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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4일 일요일

‘시민 저널리즘’이란

‘시민 저널리즘’이란
언론-시민 유기적 결합 현안 적극 개입
입력 : 1996-04-10  00:00:00   노출 : 1996.04.10  00:00:00
미디어오늘 | webmaster@mediatoday.co.kr   
15대 총선보도 현장 조사’는 궁극적으로 시민저널리즘의 착근에 목적을 두고 있다. 시민이 필요한 정보는 무엇이고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탐색하는게 이 조사의 목적이다. 외국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선 아직 생경한 ‘시민저널리즘’을 소개한다. 

시민이 주도하는 선거보도는 불가능한 것인가. 언론의 선거보도에 쏟아지는 비판은 궁극적으로 선거보도가 시민민주주의에 전혀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시민은 배제한채 언론과 후보자들간에만 쟁점과 이슈를 주고 받는식의 보도 양태를 보임에 따라 결과적으로 ‘시민’이 없는 선거, 나아가 참여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위한 움직임은 미국의 일부 지방을 중심으로 현재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9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시민저널리즘에 대한 논의는 아직 초보적이다. 일부 언론사는 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수입이나 영향력 면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른바 시빅 저널리즘(Civic Journalism), 혹은 퍼블릭 저널리즘(Public Journalism)으로 불리는 시민저널리즘은 한 마디로 언론이 객관보도라는 철학을 벗어나 시민들을 직접 조직하고 지역사회의 현안이나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비단 선거보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지역사회의 관심사와 쟁점도 모두 시민저널리즘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같은 논의는 미국지역에선 ‘운동’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시민저널리즘은 지역사회, 언론사, 시민등 3요인을 주체로 설정한다. 언론사는 지역사회를 단순한 취재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적극적인 공간으로 해석한다. 시민들도 수동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참여자로서의 기능에 비중을 더 둔다. 뉴스를 보도하는 것이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언론’이었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지역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고무하는 작업까지 떠 맡아야 한다는 것이 시민저널리즘에서의 ‘언론’기능이다. 

가령 선거 과정에서의 여론조사 문제를 보자. 기존에는 대상자들에 대한 일회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곧바로 언론에 보도했다. 그러나 시민저널리즘은 통상적인 여론조사 방법을 탈피해 일차 조사를 끝낸후 대상자들에게 현안에 대한 토론자료등을 제공하고 서로의 관점을 비교한 다음 여론조사를 다시 실시한다. 그리고 이를 보도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지역현안에 깊이 참여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기자들도 더 이상 발생한 사건만 보도하는 ‘단순전달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공모임을 조직하고 여론조사, 원탁회의 등을 통해 언론이 지역사회와 시민을 연결하는 강력한 연결고리로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시민저널리즘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신문이 이미 1백 70여개에 달한다. 이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신문사들의 경우 대부분 독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경영 수입면에서도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이러한 시민저널리즘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언론의 신뢰성을 해치고 개인의 주관적인 방향설정으로 인해 언론매체를 편파적인 논쟁의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민저널리즘 옹호론자들은 언론의 객관성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신화일 뿐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블로그 포맷 vs 신문의 포맷..승자는?

블로그 포맷 vs 신문의 포맷..승자는?

블 로그냐 신문이냐. 흥미를 끄는 주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지난 2-3년 동안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대체할 것이냐는 주제를 놓고 전 세계 블로거들과 미디어계 종사자들은 뜨거운 논쟁을 펼쳐왔습니다. 여전히 'ing'인 상태이긴 합니다만 요즘 들어선 대체로 ‘보완’ 관계로 정의하는 논자들이 많아지는 추세로 보입니다. 

제가 구독하는 블로그 가운데 publish 2.0이 라고 있습니다. Scott Karp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랑 관심사가 비슷한 블로거라 그의 포스트를 매일매일 주의 깊게 읽는 편입니다. 얼마전에 소개했던 ‘블로그는 콘텐트 매니징 시스템에 불과하다’라는 글도 이 친구의 포스트를 번역한 것입니다. 

Scott Karp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면 publish 2.inc의 공동 창업자입니다. 이 회사에서 운영하는 블로그가 Publish 2.0이고요. 이전에는 Atlantic Media의 디지털전략 Director로 일했습니다. 나름 이 분야에서 통뼈가 굵은 분이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블로그와 관련한 NYT 전망

Scott Karp가 최근 NYT의 블로그뉴스 서비스인 Bits blog 에디터인 Saul Hansell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블로그 포맷과 전통적인 언론사 기사의 포맷에 대한 NYT의 전망을 듣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질문은 “블로그와 같은 새로운 온라인 포맷이 기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만들어내고 있느냐”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Saul Hansell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나 는 과거부터 블로그가 뉴스레터와 닮았다고 생각해왔다. 콘텐트가 아니라 포맷의 측면에서. 일부 뉴스레터는 대단한 저널리즘을 담고 있기도 하고 일부는 코멘트이기도 하며, 일부는 단지 게시판 정도에 머무르기도 한다. 나에게 블로거는 뉴스레터 작성자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우리 지면 안에는 다양한 포맷의 기사들이 항상 존재한다. 뉴스페이지에는 딱딱한 뉴스도 있고, 피처나 뉴스 분석, 칼럼도 있다. 오피니언 면에는 칼럼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프레임워크는 독자들에게 사건의 이해를 돕는 수많은 방법을 제시한다. 블로그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변수이다. 예를 들면 속도나 사용자의 참여, 링킹 등의 면에서 그렇다. 그러나 블로그는 그것의 등장 자체가 우리의 과거와 단절할 정도는 아니다.

작업 플로우 측면에서, 인터넷은 더 많은 작업을 만들어냈다. 오디오, 비디오, 링크 그리고 가장 중요한 24시간 뉴스 사이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 가지 면에서 좀 더 쉬워진 것이 있는데 내가 Bits에서 풀 타임으로 근무한다는 점이다. 내가 흥미로워하고 필요로 하는 분야에 대해 매일 기사를 쓰고 있지만 난 페이퍼 신문에서 출입처를 가진 적은 없었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 NYT에 Bits의 최고 기사를 발행하고 있다.“


Scott Karp는 “블로그는 그것의 등장 자체가 우리의 과거와 단절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언급에 주목을 하더군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로그의 등장이 기존 언론의 과거와 단절할 정도로 혁신 혁명적이지 않다는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송고된 블로그를 NYT 지면에 발행하고 있는 당사자의 냉철한 분석이기에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 제 포스팅했던 바와 같이 블로그는 아직 기존 언론의 역사를 뛰어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댓글을 통해 쌍방향 소통문화를 창조해내고, 속보성을 보완하는 데 블로그가 기여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디어의 민주화와 미디어 간의 촘촘한 네트워크 구축에 기여했다는 사실도 평가받아야 합니다. 저널리즘의 진화와 파괴를 유발한 ‘미디어의 촉매’로서의 역할도 인정돼야 합니다. 

블로그가 올드 미디어를 대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존 언론을 대체할 수 있다’는 낙관적 상상만을 고집하는 건 아직 섣부르다고 봅니다. 오히려 한 독자의 지적처럼 기존 언론과 뉴미디어가 어떻게 역할을 보완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지금 단계에선 생산적이지 않나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 금까지 드러난 정향을 놓고 예측해 보건데, 블로그는 당분간 기성 언론의 강력한 보완재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강력한 보완재는 올드 미디어의 구태적 보도 및 취재 관행과 구시대적 보도 포맷을 상당 부분 흔들어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종이신문을 몰살시킬 정도의 ‘저널리즘 대체재’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블로그 기반 미디어를 운영하는 전문가들조차도 기대만큼 위협적이지 않다고 진단하고 있는 게 인정해야 할 현실입니다. 

블로그의 진화가 미디어의 진화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다 같이 진지하게 지켜봤으면 합니다. 

블로그는 저널리즘 수행할 수 있을까?

“팸플릿·뉴스레터·신문·잡지·라디오·영화·텔레비전·책 등을 통하여 대중에게 뉴스·해설·특집물 등을 수집·준비·배포하는 활동.”(브리태니커)

“Journalism is the discipline of gathering, writing and reporting news, and broadly it includes the process of editing and presenting the news articles. Journalism applies to various media, but is not limited to newspapers, magazines, radio, and television.”(위키피디아)


저널리즘에 대한 일반적 정의입니다.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소식을 전달하는 행위를 우리는 저널리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대로라면 뉴스를 전달하는 일반 행위 전반을 가리키는 다소 기계적인 정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죠.

저 개인적으로는 저널리즘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이란 대중에 알릴 목적으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진실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반 행위.”

단순 배포 행위 전반을 저널리즘이라고 정의하기엔 이미 저널리즘은 멀리 진화해 있는 상태입니다. 언론 및 출판의 목적이 단순히 배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숨어있는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사회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목적이자 정신이고 정의라고 생각합니다.(이건 저의 정의일 뿐입니다.)

저는 이 포스트의 제목을 블로그의 저널리즘 가능성 즉 블로그로 저널리즘을 수행할 수 있느냐로 잡았습니다. 새로운 미디어로 조명 받고 있는 블로그가 과연 저널리즘의 일반적 정의에 부합할 수 있는 활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겠지요.

블로그라는 단어의 탄생 초기 블로그는 개인적인 일상사를 기록하는 ‘온라인 일기’ 정도로 인식됐습니다. 이후 뉴스 기반으로 블로그를 활용한 것은 드러지 리포트였습니다.(위키피디아) 일종의 미디어로서 진화 가능성을 확인시킨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온라인 일기에 불과하던 블로그가 공적 활동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저널리즘 기능을 일정 부분 수행하는 위치까지 발전했습니다.(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프라인 신문을 떠난 기자들이 블로그로 뉴스를 전달하는 사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블로그라는 툴의 개방‧확장성과 상호작용성(RSS나 트랙백)이 신문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지요.

블로그 이용동기와 인식의 차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블로그는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 Publish2.0을 운영하는 Scott Karp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블로그는 “콘텐트를 매니징하는 시스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이 질문이 다음과 같이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으로 블로그가 더 많은 기자들에 의해 활용될 수 있을까? 혹은 블로거들이 저널리즘으로 정의될 수 있는 행위를 시작할 것인가?”

결국 저널리즘을 목적으로 블로깅을 하는 블로거가 더 늘어날 수 있느냐가 블로그 저널리즘의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라는 것이죠. 단순히 싸이월드 미니홈피처럼 블로그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룬다면 블로그 저널리즘은 매우 좁은 범위 안에서 수행될 것입니다. 저널리즘을 목적으로 블로그를 활용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기존 저널리즘의 보완하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한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블로그 이용동기에서 저널리즘 동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블로그를 통한 저널리즘 수행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블로그를 이용하는 주체의 문제로 귀결시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블로그는 분명 대중을 상대로 한 Publishing 툴로서 매력적인 시스템입니다. 신문보다 훨씬 간편하고 보기 편리하며(모바일 기기와 접합됐을 때), 상호작용적입니다. 매스미디어의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신문 이상의 배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상파라는 방송의 일방향 속성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툴임에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시민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블로그를 개설한 사람이라면 목적의식적으로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할 경우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블로고스피어입니다.

관건은 저널리즘을 목적으로 한 블로거가 많이 늘어날 수 있느냐입니다. 예전 글을 통해 저는 기자들이 좀더 많이 블로고스피어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호소한 바 있습니다. 저널리즘을 수행하는 도구로서 블로그를 더 많이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이들이 선도적으로 저널리즘의 모범 사례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저널리즘 수행 공간으로서 블로고스피어가 초발 단계에서 건강하게 진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블로고스피어는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돈 벌이에 혈안이 돼 보도자료를 무작위로 베껴오거나 트래픽을 늘리기 위해 저작권을 무시하고 기존 언론의 기사를 무단 카피하는 행태들이 좀체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못 ‘싸이 저널리즘’으로 회귀가 우려되는 시점입니다. 저널리즘 툴로서 블로그가 한 발짝 나아가지 못하고 싸이의 재탕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저널리즘 툴로서 블로그를 더 많이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미아를 찾습니다

저널리즘의 어원, 역사, 특질과 문제점

Journalism(저널리즘) 

언론활동이나 그러한 활동을 하는 직업분야를 뜻하는 말로 매스미디어를 이용하여 공공적인 사실이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취재.보도하고 이에 관한 의견제시등의 논평을 하는 활동을 이르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시사적 문제나 사실에 대한 뉴스 등을 취재.편집하여 매스커뮤니케이션 매체인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해 보도, 논평, 해설 등을 사회.공중에 전달하는 활동, 또는 이러한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 분야를 말한다. 저널리즘은 '매일매일 기록한다.'는 뜻의 라틴어'diurna'에서 유래하여 이 단어가 프랑스어 주르날(journal)이 되고 정기간행물을 뜻하는 영어 저널(journal)이 된 후 여기에 행위,주의,제도,직업 등을 뜻하는 접이사 -ism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이와 같이 어원상, 저널리즘이란 곧 신문.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는 직업활동이라는 뜻만을 가기고 있었으나 방송매체의 출현 이 후, 방송이 신문이나 잡지처럼 시사적 문제에 관한 보도와 논평 등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방송 또한 저널리즘 분야에 포함됐고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활동이나 분야를 통칭하여 저널리즘이라고 부르게 됐다. 좁은 의미로 저널리즘을 사용할 때는 시사적문제에 대한 보도와 논평.해설 등의 활동이나 이러한 활동 분야만을 지칭하고 오락, 광고 등의 활동은 제외한다. 저널리즘에서의 기록이란, 매일 혹은 정기적인 기록이라는데 그 특질이 있듯 저널리즘 또한 정기적 혹은 주기성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함으로써 현대인이 적응할 환경을 제시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저널리즘분야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을 가리켜 저널리스트(journalist)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미디어기업에 고용되어 취재, 보도, 해설, 논평등의 직무에 종사하는 기자, 카메라맨, 아나운서, 캐스터, 주간, 편집자등을 말하며, 프리랜서로 특정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을 프리 저널리스트(Free Journalist)라 한다. 


어원
저널리즘의 어원이 라틴어의 'diurna(나날의 간행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점과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사회적으로 정착한 것이 신문과 잡지가 대중전달 활동의 왕좌를 독점하고 있던 19세기 중반 무렵이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본래는 좁은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던 것이 최근에 와서 오히려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말하는 저널리즘도 매스커뮤니게이션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매스커뮤니게이션은 대중전달의 사회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종합개념인 데 비해 저널리즘은 그 일부분 또는 하위개념(下位槪念)이며, 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매체) 활동의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저널리즘의 역사 

저널리즘의 발생은 고대국가의 신문 유사물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의미로서의 모습을 보인 최초의 시기는 17∼18세기 시민혁명기로 이 시기 근대적인 신문, 잡지가 출현함으로써 근대 저널리즘이 성립되었다. 근대저널리즘은 신흥 시민계급에 의해 형성되어 봉건적.절대주의적 지배체제의 탄압에 대항하는 무기이자 시민계급의 여론과 역량을 결집하고 사회를 변혁키 위한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지배계급과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시민혁명 과정에서 시민계급이 부르짖던 중심적인 구호는 ‘언론출판의 자유 획득’이었으며 이러한 요구와 주장의 촉구 및 그 쟁취를 위한 투쟁이 저널리즘의 활성화를 촉진하게 되고 저널리즘의 활성화는 다시 시민혁명을 지원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근대저널리즘은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정보의 전달과 함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적극적인 의견표명과 언론을 통한 투쟁이라는 기능에 중심을 두게된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 및 이로 인한 노동자의 급증에 따라 저널리즘은 새로운 노동 대중을 독자로 개척, 그 활동 저변을 확대하였으며 기술의 발달, 도시로의 인구집중, 생활수준의 향상, 교육의 기회 확대 등의 역사적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한 저널리즘은 대량의 소비자와 자금을 확보하여 자본주의적 기업화를 이루게 된다. 이 후 19세기 말~20세기 초 자본주의 독점단계로의 발전과 동시에 저널리즘은 근대저널리즘에서 현대저널리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현대 저널리즘의 특질과 문제점 
현대저널리즘의 특질은 기업성과 오락성 및 권력과의 유착성에 있다. 오늘날 언론 및 방송등 매스미디어 사업은 대자본과 많은 인력 등 대량의 자산이 소요되는 업종이므로 격한 경쟁속에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여 생존키 위해선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원칙에 크게 벗어 나기 어럽다. 이에 저널리즘의 기본적 기능인 정보 및 의견의 사회적 전달기능 또한 상품화 되어 최대 다수의 최대 관심사가 될 수 있는 정보와 광고주 및 이해집단의 반발을 고려한 선택적 의견 제시 위주의 취재 보도가 이루어 지게 되어 근대저널리즘에서 보여지던 일정한 나름의 사상이나 주의, 주장, 당파적 입장이 많이 약해지고 상품 구매자로서의 평균독자들의 일반적 관심을 대상으로 한 객관주의 보도 혹은 불편부당의 보도가 일반적인 보도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 저널리즘의 기업성은 저널리즘이 자본주의 체제에 의존케 되면서 스스로를 체체의 옹호자 이자 수익자로 변모케 만들었고, 취재 및 보도 행태가 수구적, 체제유지적 성격을 띄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현대저널리즘을 근대저널리즘의 ‘퍼스널 저널리즘’에 빗대 ‘인퍼스널 저널리즘’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현대 저널리즘에 추가된 오락성은 오락제공을 목적으로 창출된 영화, 라디오, TV등의 뉴 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한 기존의 신문, 잡지, 출판등의 독자감소 및 쇠퇴와 영향력 감소라는 문제점의 대안이자 생존수단으로 차용된 특질로서 일면 불가피한 현상일수 있으나 가능한 많은 독자확보를 위해 다양한 대중의 관심분야와 취미의 반영하려다 저널리즘의 비판기능이 축소되고 인기에 영합하는 경향이 만연하여 오락 일변도의 보도 및 백화점식 나열 보도등이 유행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현대 저널리즘의 이러한 두가지 특징은 사회의 공기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기능인 사회정화 및 정의구현의 역할을 약화시켜 미디어기업 또한 기사나 보도라는 상품을 독자라는 구매자에게 판매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 기업과 유사한 모습으로 변질시켜 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그 본질적 특성상 정부정책 및 사회제도의 비판, 정치적 여론형성등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바, 정치권력 및 지배세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대자본이 투입되는 사업 성질상 사주 또는 경영자 역시 감독 규제기관인 정부 및 정치권과의 관계에 있어 대립보다 상호 협력의 관계를 유지함이 서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므로 손쉽게 유착, 서로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주는 모습을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민주주의의 초기의 국가들과 과도기적 격변기에 속한 시기에 있어 현대저널리즘이 갖게 되는 한계이자 극복해야 할 문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출처 : 인터넷 지식 검색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BY 이위재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1997년 6월 하버드대학에 모인 26명의 언론인들은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언론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언론사는 저널리즘의 본질보다 경영과 수익에 더 신경을 쓰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는데 이들은 동의했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단지 매체를 운영하는 회사의 위기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그것은 민주적 시민사회의 몰락을 뜻하는 신호이며,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빛이 사라져간다는 불안의 반영(反影)이다. 이 빛이 환하게 인간세상을 비추어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도록 해주던 시대는 행복했다. 언론은 세계를 새로우면서 친숙하고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싸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미 스크립사에서 내놓는 신문 발행인란에서는 <빛을 비추어주면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이란 강령이 적혀 있다.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 발족했다. 2년에 걸쳐 3000여명이 토론에 참여, <지금 우리에게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했다. 그 흔적을 뉴욕타임스 워싱턴 지국장을 거쳐 현재 하버드대 니만언론재단 큐레이터인 빌 코바치와 LA타임스 미디어비평 담당 기자 톰 로젠스틸이 대표 집필해 한 권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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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한 정보에 대해 목말라 있다. 친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 후 주고받는 대화는 종종 <혹시 그거 알아> <그 얘기 들었어>일 것이다. 이미 인간은 뉴스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이 흐름이 막히면 어둠이 내리고 불안이 커진다. 세상은 적막에 빠져들고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는 답답함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한다.
뉴스는 인간이 삶을 지탱하고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인간 관계를 넓히는 데 필요한 자양분인 셈이다. 이 뉴스를 공급하는 시스템을 우리는 미디어, 언론이라고 부른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저널리즘의 목적은 <시민에게 그들이 자유로워지고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이 신성한 대원칙은 언론이 민주주의를 위해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다는 설명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언론을 통해 세상의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언론이 정보통제자로 기능할 수도 있고, 잘못된 뉴스를 사실인 양 포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이 주는 정보는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진실>이라는 다소 혼란스런 원칙을 고수하는 여정이다. 진실은 숨어있는 사실을 끄집어 내고, 겉으로 보기에 아무 상관없는 사실들의 논리를 짜맞춰 이해시키며, 나아가 사람들이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나침반이다. 사실(fact)을 성실하게 보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사실에 대한 진실(truth about the fact)을 보도하는 게 필요한 때다.
사견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범벅이 된 기사를 보면서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기자들의 본래 임무다. 중요하지만 아직 거칠고 정리되지 않은 정보들을 흥미 있고 관련성 있는 기사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법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저널리즘은 어느 누구보다 시민들에게 충성해야 한다. 이는 직업적 자부심 이상의 것이며, 시민들과 맺은 사실상 묵시적 계약인 셈이다.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려주어 대중의 비판과 논평을 위한 공개 토론장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성숙된다.
오늘날 언론사 간부들은 회사의 경영에 민감하다. 그들의 해당 연도 성과는 바로 당해 수익과 종속관계에 놓여 있으며 미국 언론에도 이런 분위기는 만연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광고는 바로 언론사의 젖줄이자 생명유지장치다. 뉴욕타임스 광고부가 뉴스가 특별히 많은 날은 과감히 광고를 포기하는 전략을 택하는 풍경은 꿈같은 얘기다.
그러나 독자는 단지 <고객>이 아니다. 신문사는 <신문이란 상품>을 판다기 보다 진실을 알려주어 사람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올바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기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서 본지는 대중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물질적 이익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실을 전달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저널리즘은 그래서 끊임없이 검증(verification)을 거쳐야 하며, 취재 대상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기자는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뉴스를 만들어야할 의무가 있다.
저널리즘이 오락, 선전, 선동과 다른 부분은 바로 검증의 규뮬을 지닌다는 점이다. 투키디데스가 2000년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문에서 밝힌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사실 보고와 관련해…..나는 나에게만 일어난 이야기를 쓰지 않고 나 자신의 일반적 인상에 이끌려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 내가 묘사한 사건이나 목격자로부터 듣고 가능한 한 철저히 점검한 사건의 현장에도 직접 가보았다. 그랬는데도 진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같은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한쪽 입장에서 편파적인 발언을 하거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 진술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상황과 해석을 덧붙이는 일을 서두르기보다는 <통합과 검증>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소문. 빈정거림, 중요하지 않은 것들, 그리고 편견을 추려내고 그 이야기에 관해 진실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기자들이 현장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절실하게 부딪히는 고민은 <물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른 매체가 먼저 다룬 뒤 만회하기 위해, 혹은 그런 낌새가 보일 때에 종종 기자들은 무리해서 불확실한, 검증이 덜 된 정보를 기사화시키다 낭패를 겪곤 한다.
경쟁에서 지는 순간, 상급자들이 쏟아내는 히스테리는 기자들의 정서를 황폐하게 한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서 모멸감을 자주 당할 수록 수명은 단축되고, 결국 이를 피해 보기 위해 <일단 지르고 보자, 아님 말고>라는 무책임한 태도가 양산되는 구조다. 사실 언론사 간의 이런 무한경쟁 구도 속에서 진실에 대한 책임감을 갖자고 외쳐대는 모습은 한가한 담론일 수 있다.
그래도 브레히트가 언급하듯 진실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은 한낱 바보지만, 무엇이 진실인 줄 알면서 침묵한다면 이는 범죄자다. 기자가 범죄자 취급을 받아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언론인은 개인의 양심에 따라야 한다. 기자는 기사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산한다. 기사는 기자의 총제적 본질이며, 부당한 외부의 압력이나 왜곡된 사실을 강요받았을 때 언제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정체성을 방어해야 한다. 기자는 언제든 사표를 던질 각오를 갖고 일해야 한다는 게 미국 언론인들의 권고다.
언론이 결국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권력의 독립된 감시자다. 연방 대법원은 1971년 <국방부 기밀문서(Pentagon Papers)>라 불리는 정부의 극비문서를 <뉴욕 타임스>가 보도할 권리를 옹호하면서 <수정헌법 제1조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 민주주의에서 기본적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보호를 자유 언론에 부여했다. 언론은 통치자가 아니라, 통치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치 섞인 표현으로 언론의 신조는 <고통받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말이 있다.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를 통해 우리는 저널리즘이 일종의 지도 제작, 시민들이 사회를 항해하기 위한 지도를 제작하는 사명을 띤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이 저널리즘의 효용이며, 경제적 존재 이유다. 기자란 이토록 숭고한 직업임에도 현실은 그다지 희망적이지만은 않다는 데 새로운 고민이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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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웨스트 윙>의 작가이면서 영화 <소셜 네트워크>와 <머니볼> 각본을 썼던 애런 소킨이 대본을 쓴 HBO 드라마 <Newsroom>은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볼만한 작품이다. 2012년 첫 방영을 시작, 시즌2까지 나왔다. 콜드플레이 노래 <Fix You>가 흐르는 이 장면은 마지막까지 사실에 충실해야하는 게 저널리즘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관이란 점을  웅변하고 있다.
http://blogs.chosun.com/wjlee/2014/08/05/%EC%A0%80%EB%84%90%EB%A6%AC%EC%A6%98%EC%9D%B4%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저널리즘(Journalism)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미디어와 많은 관련성이 있는 저널리즘은 미디어의 폭 넓고 급격한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확장되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개념 역시 변하는 것이라면결코 변하지 않는 저널리즘의 근본적 속성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그에 따라 변하는 상황 속에서는 또 어떠한 속성과 의미가 새롭게 개념화되어야 하는지 살펴봐야할 것이다.

 먼저 저널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diurna'이다. ‘매일 매일 기록한다.’는 뜻의 이 단어는 프랑스어 'journal'으로 발전하고이것이 또 영어로 발전한 뒤접미사 '-ism'이 붙어 생겨난 말이다즉 이러한 어원을 바탕으로 현재 연세한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신문잡지,방송 등 인쇄전파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활동이나 사업.’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우병동정일형김용성, 2007).

 저널리즘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살펴보면한국언론연구원에서 발행한 매스컴 대사전의 언론활동이나 이러한 활동분야로서 시사적 문제에 대한 뉴스 등을 취재편집해서 신문잡지,언론 등을 통해 보도논평해설 등을 하는 활동또는 이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 분야(한국언론연구원 편, 1993).’나 방송문화진흥회에서 발행한 방송대사전에서 정의한 시사적인 정보현상의견을 사회에 널리 전파하는 활동(방송문화진흥회 편, 1990)’ 등이 있다.

 위의 많은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볼 때저널리즘이란 것은 크게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이 말대로라면 축구 중계나오락 프로그램도 저널리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미디어의 측면에서도 전화나, e-mail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닌 대중을 대상으로 전달하는 매스 미디어를 의미한다다만최근 급격한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서 매스 미디어로 분류되지 않지만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는 뉴 미디어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 역시 필요하다.

 즉저널리즘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이라는 활동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어떠한 것인지또 이에 따라 미디어는 어떻게 이용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단순히 기존의 신문과 방송을 이용한 정기 간행물이라는 정도의 좁은 의미로 저널리즘을 설명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다양한 특성과 영향 등을 간과하는 결과이고따라서 저널리즘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우병동정일형김용성, 2007)

 그렇다면 먼저 저널리즘이 다루는 메시지는 어떠한 것인가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뉴스가 저널리즘의 메시지가 된다하지만 뉴스라는 것은 기존 매스 미디어를 저널리즘의 모든 주체라고 봤을 때의 용어이기에구체적으로 저널리즘이 다루는 메시지가 어떠한 지 살펴봐야한다학자에 따라 저널리즘의 요소나 기능을 분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개념이 진실성과 시의성또 독립성이다.

 진실성은 저널리즘이 다루는 메시지가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 진실 탐구는 창작된 문화 예술 영역에 속한다그런데 저널리즘에 있어서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바탕으로 의견과 입장이 들어가기도 한다하지만 그러한 의견과 입장 역시 사실을 바탕으로 나온 결과이어야 한다물론사실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저널리즘 주체의 의견이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진실은 쉽게 진실이라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하지만 기자인 우드워드(Woodward)의 최선을 다해 얻을 수 있는 진실에의 한 해석”(Brooks et al., 1988. 20쪽에서 재인용)이라는 진술처럼 저널리즘 주체는 진실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은 활동 주체의 진실을 찾기 위한 윤리성이 요구된다이러한 윤리성의 문제가 최근 미디어의 상업화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널리즘 붕괴’, ‘저널리즘 위기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널리즘의 진실성을 통해 저널리즘의 존재 목적을 찾아낼 수 있다사람은 누구나 진실을 탐구하려는 욕망이 있다하지만 커져가는 사회 속에서 모두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저널리즘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혹은 집단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또한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한 번에 다수에게 메시지 전달이 가능해지면서 현대적 저널리즘이 탄생했다미디어를 이용해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진실을 탐구하기가 어려운 것은 물리적 이유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진실을 가리려는 권력과 무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에는 다음 특성인독립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저널리즘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바로 독립성이다다른 말로는 자율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는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진실성을 지키기 위한 요소가 된다저널리즘이라는 활동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 시작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저널리즘 주체 스스로 내린 판단과 스스로 찾은 사실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형성된 메시지이어야 한다.

 다음은 시의성이다저널리즘 메시지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예전의 지식을 다시 알리는 것은 단순한 역사를 알리는 것이다새로운 것이야 말로 저널리즘이 갖춰야할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이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최신성 혹은 즉시성을 말하지만 꼭 시간적인 의미는 아니다예전의 사건이나 이슈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진실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 역시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대표적으로탐사 저널리즘은 기존에 감춰져 있던혹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새로운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이민웅, 2003).
정리해보면 저널리즘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은 주체가 진실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이는 기존의 전통적으로 정의하던 저널리즘에서 가장 핵심만을 뽑아내어시대나 상황에 관계없이 저널리즘이 가지는 속성인 것이다문제는 미디어의 변화로 이러한 속성이 나타나는 채널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고과연 저널리즘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따라서 지금까지 저널리즘이 무엇인가를 정의했기에 이제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저널리즘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할 차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많은 변화를 가지고 오는 미디어의 변화란 무엇인가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디지털과 인터넷이다컴퓨터로 대표되는 디지털 방식은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대체했다.디지털로의 변화했다는 것의 의미는 그 정보 처리와 전달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지고아날로그 방식에서는 함께 취급할 수 없던 소리영상이미지텍스트 등이 함께 처리되어 방송과 통신 등의 영역 역시 무너지게 하는 변화를 이끌고 왔다는 것이다(김병철, 2005). 인터넷은 커뮤니케이션에서의 변화를 가져왔다정보의 교류가 다수와 다수가 비동시적이고 개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즉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정보를 동시에 즉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또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기존의 미디어와 다르게 인터넷은 접속하는 모든 주체가 정보와 메시지를 창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누구나가 미디어를 소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과 인터넷의 발달은 다양한 플랫폼의 미디어를 등장시켰다기존의 한정되어있던 미디어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고따라서 늘어난 미디어의 채널만큼 대중의 미디어 집중도는 떨어지게 되었다이에 따라 저널리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기존 미디어의 파워는 약해졌다늘어난 저널리즘의 주체가 늘어난 신문사나 방송사의 숫자라서 저널리즘 파워가 약해진 것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하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의해 미디어 주체가 인터넷을 이용하는(사실상 모든 사람사람 모두가 될 가능성이 있고많은 사람이 그렇게 주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미디어의 특성과 경험에 있어서 기존의 전통 미디어와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의 전문성과 신뢰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가새롭게 등장한 비전문적 미디어인 트위터가 가장 먼저 전달했던 아이티 지진은 저널리즘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개인 블로그에 방문했던 식당의 청결성의 문제를 올린 것전문성이라고 전혀 없는 한 초등학생이 핸드폰으로 찍어서 올린 과도한 체벌 영상은 저널리즘인가 아닌가어떤 기존 미디어도 포착하지 못했던자동차의 결함을 UCC로 제작해 올려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낸 것은 어떠한가이에 대해 저널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과연 저널리즘의 의미는 새롭게 바뀌는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위에서 스스로 정리했던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은 주체가 진실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 이 정의에 따르면 트위터의 메시지도블로그의 글도초등학생의 영상도자동차UCC도 모두 저널리즘의 결과이다이 모두가 저널리즘인 것이다.

 그렇지만 선뜻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기 멈칫하는 것은이러한 비전문적이고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는 메시지 중에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이다블로그나 UCC, 트위터를 모두 저널리즘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사실 이러한 새로운 저널리즘에 대해 UCC 저널리즘이나 트위터 저널리즘으로 일반화해 부르기가 어렵다하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저널리즘을 부정할 수는 없다다만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러한 뉴 미디어 속에서 저널리즘이 더욱 잘 발현되고 유지될 수 있을 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우리는 지금까지 저널리즘을 행사하던 주체를 신문사나 방송사 등 특정 미디어로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에 속한 개인들 역시 저널리즘의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다하지만 이제 이 저널리즘의 주체가 어떤 종류의 미디어에 속해있는 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이제는 역할이 저널리즘을 판단하게 된 것이다다만이것이 기존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으로 돈을 받는 사람들만 존재하던 것이돈을 받지도 않고도 더욱 강력한 저널리즘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전통적 의미의 저널리즘 주체들은 돈 값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UCC나 블로그에서 나타나는 저널리즘을 비전문적이라고 부정 한다고 해서 전통 저널리즘 주체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엄연한 새로운 저널리즘의 주체가 탄생한 것은 막을 수 없다결국저널리즘의 전문가로서 인정받거나 신뢰를 원한다면 돈을 받지 않는 비전문적 저널리즘 주체들이 해내는 만큼 그 이상을 해내는 수밖에 없다그러기 위해서는 비전문적 저널리즘이 발생하는 이유또는 저널리즘 그 존재의 이유독립적인 진실에의 탐구에 더욱 전문적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김병철. (2005). 온라인 저널리즘의 이해. 서울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이종욱 역. (2008). 저널리즘의 기본요소서울한국 언론재단
우병동정일형김용성. (2007). 뉴미디어 저널리즘. 부산세종출판사
이민웅. (2003). 저널리즘위기변화지속. 서울: ()나남출판
최민재. (2007). 동영상 UCC와 저널리즘서울한국언론재단.
필림 마이어성동규김광협 역. (2008). 디지털 시대 저널리즘 구하기 커뮤니케이션북스()
 
Posted by 허호필
http://hhp8621.tistory.com/entry/What-is-the-Journalism-%EC%A0%80%EB%84%90%EB%A6%AC%EC%A6%98%EC%9D%B4%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for-PR%EA%B8%B0%ED%9A%8D%EC%8B%A4%EC%8A%B5


2014년 11월 5일 수요일

커뮤니케이션 권력, 마누엘 카스텔

- 마누엘 카스텔의
마누엘 카스텔스 (지은이) | 박행웅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4-10-30

‘현대사회의 가장 앞선 커뮤니케이션 권력 이론가’ 마누엘 카스텔, 마음과 정치를 말하다! 마누엘 카스텔은 그동안 정보기술 혁명과 네트워크 사회의 변화에 관련해 ‘정보시대 3부작’을 비롯한 독보적인 연구업적을 쌓아왔다. 이 책은 카스텔이 그러한 자신의 연구성과들을 발판으로 현대 사회의 정치와 커뮤니케이션/권력 관계를 설명하는 ‘커뮤니케이션 권력이론의 제1부’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정보화 시대에 진입한 각양 사회의 정치 권력관계와 미디어 실천을 통합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그의 관점은 학제에 구애됨이 없고 그가 거론하는 사례들은 그의 조국 스페인에서부터 중국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다.

또한 카스텔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인지심리학과 뇌신경과학의 성과들을 자신의 학문 세계에 통합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뇌신경과학/감정 연구와 같은 새로운 연구의 층은 카스텔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더욱 풍부하고 폭발력 있는 담론적 가능성을 더하고 있다.

서장
제1장_ 네트워크 사회의 권력
권력이란 무엇인가? / 글로벌 시대의 국가와 권력 / 네트워크 / 글로벌 네트워크 사회 / 네트워크 국가 /
네트워크 속의 권력 / 네트워크 사회의 권력과 대응권력 / 글로벌 네트워크 사회에서 권력관계의 이해

제2장_ 디지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혁명? / 기술 융합과 새로운 멀티미디어 시스템: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서 매스 셀프 커뮤니케이션까지 / 커뮤니케이션의 조직과 관리: 글로벌 멀티미디어 비즈니스 네트워크 / 규제정책의 정치 / 글로벌화된 세계의 문화적 변화 / 창조적 수용자 / 글로벌 디지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제3장_ 마음과 권력의 네트워크
마음의 풍차 / 정서, 인지 그리고 정치 / 선거운동에서의 정서와 인지 / 신념의 정치 / 마음의 프레이밍 / 마음의 정복, 이라크 정복, 워싱턴 정복: 오보에서 현혹까지 / 프레임의 힘

제4장_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프로그래밍하기: 미디어 정치, 스캔들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
이미지 메이킹에 의한 권력 창출 / 의미의 킬링필드: 작동하는 미디어 정치 / 스캔들 정치 / 국가와 미디어 정치: 프로파간다와 통제 / 공공 신뢰의 소멸과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 / 민주주의의 위기?

제5장_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재프로그래밍하기: 사회운동, 저항정치 그리고 새로운 공적 공간
지구 온난화 달구기: 환경운동과 새로운 자연문화 / 네트워크는 메시지이다: 기업 글로벌화에 반대하는 글로벌 운동 / 저항활동의 모바일화: 무선 커뮤니케이션과 실천하는 저항공동체 / “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 예비선거 / 네트워크의 재프로그래밍, 마음의 재배열, 세계의 변화

결론_ 커뮤니케이션 권력이론을 향하여
이와 같이 네트워크화된 사회운동이 실행하면서 제안하고 있는 것은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의 중심에 있는 새로운 유토피아이다. 즉 사회의 기관 대 주체의 자율성의 유토피아이다. 실제로 사회가 기존의 기관들을 통해 구조적인 위기를 관리하지 못할 때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스템 밖에서뿐이다. 그 방법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시작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서 그들 자신을 구성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의해 구축된 네트워크 형태로 발전한 권력관계의 변환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물질문명을 구현하고 자율성의 사회적 구축을 위한 특권적인 플랫폼이다. (49쪽 / 2013년판 서문)
정권이 권력을 영속화하는 데 검열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면 왜 통제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깡그리 폐쇄했겠는가? 왜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에 확실하게 개입하려 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신이(오직 인증된 신만) 교실에 반드시 강림하도록 하는가? 왜 학생들은 언론 자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노조는 왜 회사에 대한 정보를 (그때는 게시판에, 이제는 웹사이트에) 알리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 옛날에 내가 감지하고 현재 내가 신봉하는 바는 권력은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와 미디어 기업 같은 거시 권력이든지 또는 각종 조직에 속한 미시 권력이든지 간에 말이다. 그래서 당시 붉은색 잉크가 가득한 원시적 블로그를 사용한 나의 자유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투쟁은 저항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파시스트들은 그들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붙잡아서 가둬두고 개인의 마음을 공중의 마음과 연결시키는 채널을 폐쇄하는 것이 옳다. 권력은 커뮤니케이션을 능가하고 커뮤니케이션은 권력을 능가한다. (57~58쪽 / 서장)
네트워크에서 권력을 구축하는 두 개의 기제인 프로그래밍(programming)과 스위칭(switching)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물론 네트워크 목표를 프로그래밍하는 능력(아울러 재프로그래밍하는 능력)은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네트워크는 한번 프로그램이 짜이면 효율적으로 수행될 것이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조와 노드 면에서 스스로를 재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프로그래밍할지는 각각의 네트워크에 따라 그 프로세스가 고유하다. 이 프로세스는 글로벌 금융에서 동일하지 않다. 이는 군사력, 과학 연구, 조직범죄 또는 전문 스포츠에서 동일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네트워크 수준에서 권력관계는 각 네트워크의 특성에 따라 찾아야 하고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네트워크는 공통의 특성을 공유한다. 즉, 아이디어, 비전, 프로젝트, 프레임은 프로그램을 발생시킨다. (제1장 / 111쪽. 제1장 네트워크 사회의 권력)

 최근작 :<커뮤니케이션 권력>,<여파>,<이동통신과 사회> … 총 70종 (모두보기)
 소개 :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커뮤니케이션 학자이자 다섯 번째로 많이 인용되는 사회과학자로 공인(2000~2009년 사회과학자 인용지수)된 바 있으며, 특히 정보사회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정통한 사회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1942년 스페인에서 출생했으며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법률과 경제를 공부하다가 프랑코 총통의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가담했고 이후 파리에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했다. 파리 대학교에서 공법 및 정치경제 석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사회학 부교수...
 최근작 :<글로벌 거버넌스 2025>,<TV에세이 좋은 생각> … 총 21종 (모두보기)
 소개 :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라노, 류블리아나 주재 KOTRA 관장 및 KOTRA 정보기획처장, 한국출판협동조합 전무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는 <소용돌이의 한국정치>(2000, 공역), <디지털경제 2000>(2000, 공역), <밀레니엄의 종언>(2003, 공역),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2003, 공역), <인터넷 갤럭시>(2004), <네트워크 사회>(2009), <구글, 유튜브, 위키피디아, 인터넷 원숭이들의 세상>(...

2004년 스페인 선거, 2008년 오바마 당선, 2011년 재스민 혁명……
우리가 본 것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재프로그래밍, 혹은 ‘마음의 혁명’이었다! 

2004년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열차 폭파 사건은 1,5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남기며 스페인 전역을 슬픔에 빠뜨렸다. 총선을 불과 사흘 앞둔 상태에서 정부와 여당은 이 사건의 주범이 바스크 테러 집단 ETA로 추정된다는 정보를 흘렸지만, 곧 이것이 스페인의 이라크전쟁 참여에 보복하기 위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권력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고 국민적 슬픔을 선거에 이용하려 한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주류 언론이 정부와 여당의 논평을 그대로 내보내기 바쁘고 야당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몸을 사리는 상황에서도, 독립적인 군소 언론과 이동전화, 이메일 등을 통해 진실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전파되었다. 시위나 집회가 허용되지 않던 선거일 전날, 잠복해 있던 시민들의 분노는 한 통의 문자 메시지에서 촉발되어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일주일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선거 결과로 이어진다.
마누엘 카스텔의 용어로 말하자면 개개인의 마음이 연결되면서 그때까지 권력과 메타 프로그래머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여겨지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에 대한 재프로그래밍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2008년 오바마 선거운동이나 2011년 재스민 혁명(이 책에서 거론되지는 않지만)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정보시대 네트워크 사회의 구루로 통하는 마누엘 카스텔이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이러한 사건들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네트워크 사회의 변화가 정치 및 권력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중대한 의미들을 품고 있다. 이미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기술적, 제도적, 문화적 연구에서 굉장한 업적을 남긴 카스텔은 이 책에서 드디어 정치와 권력, 그리고 미디어의 문제를 핵심에 놓고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권력이론’이라 칭할 만한 것의 초석을 닦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에서 권력은 어디에 있는가? 

한때 인터넷과 함께 정보화 시대가 꽃을 피우면서 권력은 이제 시민에게 이양되고 국가의 통제도 약화되리라는 낙관론이 퍼졌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소수 기업들이 네트워크를 지배하고 중국, 러시아처럼 세계 곳곳의 국가들이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매스 미디어에 대한 국가 통제를 오히려 더 강화하는 모습을 광범위하게 목도하고 있으며, 각국의 탈규제정책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금융 자본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블로그, 유튜브, SNS 등으로 대표되는 ‘매스 셀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개인들 자신이 미디어가 되어 네트워크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일도 분명히 늘어나고 있다. 권력과 대항권력의 싸움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 중이며, 그 향방은 분명하지 않다. 카스텔은 이제껏 자신의 중심 테마 중 하나이기도 했던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다시 한 번 모색하면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권력에 관한 보다 심층적인 질문들로 나아간다.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에서 권력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배제/포함의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권력’을 쥔 메타 프로그래머들은 대체 누구인가? 각국의 실제 정치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네트워크를 프로그래밍하는가? 대항권력에 의한 재프로그래밍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하며 좌절하는가? 이 책은 권력의 속성 자체에서부터 출발해 네트워크 사회에서 네트워크/네트워킹/네트워크화된 권력이 작동하는 양상, 그리고 작금의 글로벌 정치, 경제, 문화에 내재하고 있는 권력관계의 특징들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마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미디어 정치와 정치 스캔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상징의 조작! 

알코올 중독자에 ‘탕아’ 이미지를 지녔던 조지 W. 부시가 거듭난 기독교인으로서 신의 계시를 수행하는 인물로 탈바꿈해 대통령이 된 것, 정치를 희화화하고 극장화하여 정치에 대한 냉소를 부추김으로써 집권을 이어갈 수 있었던 베를루스코니의 예는 현대 정치에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미지와 상징 조작의 힘을 보여준다. 각국의 정치 스캔들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공공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 이것들은 카스텔이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마음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치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고 권력은 게이트키핑과 스위칭(switching), 미디어 개입(의제설정, 프레이밍, 점화, 연동화) 등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것이 마음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감정과 은유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쟁을 지속해나가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 애국주의, 구조 내러티브 프레임 등을 적절히 혼용해가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정서를 지속적으로 불러일으켰다. 오바마의 등장과 당선은 희망이 이 두려움을 넘어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했기에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고 주요한 연구 사례로 다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국가에서 90% 이상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는 과학자 집단 같은 소수의 대항권력의 메시지가 어떻게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마침내 사회의 주류적 인식으로 부상했는지를 보여준다.

연결하라, 단절하라, 재연결하라
프로그래밍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재프로그래밍하기 

카스텔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진보가 TV나 라디오 같은 올드 미디어들을 변모시키면서 정치의 모습 또한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혹은 그 역의 경우는 어떠한지를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그저 TV를 시청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과 대안적인 출처를 통해 정보를 찾고 통합/편집하며 리믹스해내는 창조적 수용자들과, 핵심적인 네트워크 결절점(노드)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국제적인 메타 프로그래머이자 스위처(switcher)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뉴스코퍼레이션의 머독과 같은 ‘창조적’ 권력 장악자들은 이 책에서 특히 조명을 받고 있다.
카스텔에게 네트워크는 우리 마음의 프레임을 구조화하기에 막강한 것이다. 비록 메타 프로그래머들과 스위처들이 네트워크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한번 프로그래밍된 네트워크는 스스로를 재구성해가면서 포함/배제의 이진법적 논리를 작동시키지만, 때로는 창조적 수용자들에 의해, 때로는 풀뿌리로부터 타오른 분노에 의해, 때로는 희망의 담지자로서 나타나는 걸출한 개인에 의해 재프로그래밍이 시작될 수 있다. 카스텔은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는다.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시작된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어쩌면 가장 중대한 분기점에 이른 이 시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희망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출판사 서평] 


‘현대사회의 가장 앞선 커뮤니케이션 권력 이론가’ 마누엘 카스텔, 마음과 정치를 말하다!
마누엘 카스텔은 그동안 정보기술 혁명과 네트워크 사회의 변화에 관련해 ‘정보시대 3부작’을 비롯한 독보적인 연구업적을 쌓아왔다. 이 책은 카스텔이 그러한 자신의 연구성과들을 발판으로 현대 사회의 정치와 커뮤니케이션/권력 관계를 설명하는 ‘커뮤니케이션 권력이론의 제1부’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정보화 시대에 진입한 각양 사회의 정치 권력관계와 미디어 실천을 통합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그의 관점은 학제에 구애됨이 없고 그가 거론하는 사례들은 그의 조국 스페인에서부터 중국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다.
또한 카스텔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인지심리학과 뇌신경과학의 성과들을 자신의 학문 세계에 통합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뇌신경과학/감정 연구와 같은 새로운 연구의 층은 카스텔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더욱 풍부하고 폭발력 있는 담론적 가능성을 더하고 있다.
이 책은 “1930년대 이래 글로벌 경제에서 가장 광범위한 경기 하강 국면에서, 1960년대 이래 가장 중요한 미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세계 정치에서 수 세대 동안 볼 수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국면에서, 그리고 현대 시민의 삶에 대한 가장 심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국면에서 쓰였다”(안토니오 다마지오). “모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에게 추천할 만하지만, 또한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성격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 흥미로울”(마르고트 발스트룀) 이 책은 “네트워크 속에서 권력이 어떻게 운용되고 그런 권력이 어떻게 도전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해줄 것이다”(옮긴이).